기본소득과 다중 - 야마모리 도루, '하나인 다중'에 대한 논평

  

  금민(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사회대안포럼 운영위원장)

 

 

1. 두 가지 논점

 

일본기본소득네트워크의 야마모리 도루 교수의 발표문의 논점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기본소득과 임금노동의 관계에 대한 자율주의적 입론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이 도입될 맥락"에 관련된다. 물론 이 두 번째 논점 역시 '기본소득은 제국의 책략인가'라는 자율주의적인 문제의식에 연관된다. 도루의 답변은 설령 그것이 제국의 책략일지라도 "의식적으로 기본소득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요구들을 타협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도입운동이 동시에 자신의 슬로건으로 해야 할 "다른 요구들"에 대하여 도루의 발표문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도루는 "어떤 종류의 법안이 기본소득과 함께 도입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풀뿌리 운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발표문에서 소개된 영국 클레멘트 조합운동과 일본의 장애인 운동 '푸른잔디'의 예는 "극단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국제적 통제 레짐에 대항하여 일어난 서로 중첩되는 투쟁들이 존재한다는 객관적 우연의 일치"(H&N 2000, p. 262-3)를 실증하기 위한 사례로 등장할 뿐이다.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기본소득 운동이 자신의 요구로서 받아 안아야 할 '다른 요구들'은 "삶이 곧 노동"이라는 특유하게 자율주의적인 문제 지평을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소득 도입 운동과 결합되어야 할 다른 종류의 사회적 의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삶이 곧 노동"이라는 요구가 노동사회 내부의 전통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중첩되며 또한 그 해결 방식에 있어서 둘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논의 지평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2. 도루의 자율주의 기본소득론

 

도루에 따르자면, 하트/네그리의 기본소득 옹호를 복지국가론과 등치시키는 비판(Boron 2005, pp. 89-90)은 핵심을 빗나간 오해이며,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임금노동 중심성과 기본소득의 탈노동패러다임의 차별성을 간과한다. 도루는 전통적인 복지국가와 기본소득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분석하면서 임금노동의 중심성 문제가 불연속성의 핵심에 위치한다고 밝힌다.

 

a)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직접 소득이전체계가 개인의 기여를 전제로 하는 사회보험, 조건에 부합되는지를 심사하는 절차를 전제로 하는 사회부조, 이와 같은 조건과 결부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범주의 사람에게만 지급되는 사회수당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급여로 구성되는데, 이 세 가지 소득이전 방법은 결코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으며 그 중에서 사회보험이 복지국가의 핵심에 위치한다.

b) 전통적인 복지국가는 개인의 기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며 사회부조 및 사회수당은 최소한 규범적 측면에서 보충적이다.

c) 이는 전통적인 복지국가가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하여 설계되었음을 뜻한다.

 

반면에 기본소득은 - 하트/네그리에 따르자면 - 더 이상 전통적인 노동가치설이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 생산의 변화에 조응하는 새로운 요구로 파악된다. 즉 "산업노동자 계급만이 아닌, 가정주부와 실업자를 포함한 다중 전체가 가치를 생산"하는 현재의 생산방식에서, 즉 "자본의 생산이 사회적 삶 그 자체의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수렴하고 있는"(H&N 2000, p. 401) 생체정치적 생산방식에서는 다중은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

 

도루의 발표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제국]에서 전개된 논리는 '사회적 임금'을 경유할 필요 없이 직접적으로 기본소득에 도달할 수 있음에도 왜 하트/네그리가 '사회적 임금'을 언급하는가의 문제이다. 도루는 그 이유를 이탈리아에서의 노동거부 운동의 경험, 즉 임금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 학생, 가정주부들이 임금 노동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또 다른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 또한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역사적 경험과 노동거부에 대한 초기 네그리의 이론화 작업에서 찾는다. 물론 "맑스는 노동의 폐지를 주장"했고, 해방된 노동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네그리 1991, p. 165)"이라고 보는 네그리의 입장은 '사회적 임금'이나 '사회적 노동자' 개념을 경유할 필요 없이 직접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옹호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왜 네그리는 '사회적 임금'을 경유하여 기본소득을 옹호할까? 도루가 찾은 답은 "노동가치설은 또한 가치노동설"이며 "전자가 설명력을 잃고 있다면, 후자는 다양한 운동들의 단일성"을 보장해 준다는 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루는 전통적인 계급투쟁과 새로운 사회운동 모두 "노동 그리고 가치의 정의를 둘러싼 투쟁"이며 결코 이분법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임금노동자의 투쟁이건 비물질노동 종사자의 투쟁이건 모두 '사회적 노동자'의 투쟁으로 단일성 속에서의 다양한 갈래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은 이론적 맥락, 곧 '다양한 운동들의 단일성'과 '가치의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측면에서 기본소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임금'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적 노동자운동과 신사회운동을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은 네그리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이론적 맥락에서도 전혀 다른 근거로 수긍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 둘은 동일한 오류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되풀이하고 있다는 주장도 양자를 대립적으로 구별하는 통상의 지적 태도와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에 관해 상론하는 것은 논평의 본분을 벗어난다. 일단 여기에서는 도루가 지적한 문제, 즉 '사회적 노동'과 '사회적 임금' 범주가 전통적인 운동과 신운동의 단일성을 보장하며 다양한 주체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대해서만 집중하도록 하자.

 

3. 네그리의 '확장된 노동' 개념을 둘러싼 쟁점

 

도루는 '사회적 임금' 범주가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여러 운동들의 단일성을 보장해 준다고 본다. 그런데 정작 이 주장의 타당성을 따지기 위해 필요로 하는 논의는 과연 임금노동(Lohnarbeit)과 임금을 받지 못하는 기타 여러 가지 활동(Tätigkeiten)의 구별을 넘어서서 이를 단일하게 '사회적 노동' 개념에 의하여 통합함으로써 전통적인 노동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네그리가 수행한 노동 개념의 확장은 고용노동 범주를 매개로 하는 착취(Exploitation, Ausbeutung) 개념과 고용노동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수탈(Expropriation) 개념의 구분을 넘어서서 두 가지 모두를 '확장된 착취' 개념 아래로 단일하게 포괄하게 됨을 뜻한다. '확장된 노동' 개념은 사실상 '확장된 착취' 개념을 내포하는데,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이 사라지고 생체정치적 생산방식이 등장했다는 네그리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임금노동/활동, 착취/수탈의 구분은 불필요해진다. 이와 같은 구분이 생산과 재생산, 생산과 분배의 구분에 연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네그리의 이해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임금노동과 기타 활동, 착취와 수탈의 분단선은 실제 경제의 분단선이 아니라 노동가치설과 임금 범주를 강제적으로 유지하려는 자본의 자의적 분단선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네그리의 가설에 대한 논박은 분명 이 논평문의 분량을 벗어나는 주제가 될 것이다. 다만 네그리가 그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상은 특유의 철학적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배경철학을 달리한다면 동일한 사태들은 달리 이해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동일한 사태들에 대하여 네그리와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정보혁명의 결과 임금노동 이외의 활동들을 매개로 사회적 생산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지대적 수탈이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강남훈, 2010).

 

아울러 우리는 - 그것이 자본의 자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이든 -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임금노동과 기타 활동, 착취와 수탈의 분단선을 네그리처럼 이론적으로 소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과연 효과적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착취당하는 임금노동자와 수탈당하는 '실업자, 가사노동자, 학생' 등의 구분은 단순히 개념적이거나 이론적인 구분이 아니며 사회적 실재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 질문은 중요해진다. 이 구분은 현존 노동사회에서의 실제적 효력(Geltung)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효력논리는 가치의 원천의 문제 등과 같은 발생(Genesis)의 문제도 역으로 규정한다. 수탈은 이윤을 생산하지 않으며 착취로 인해 발생한 총이윤의 재분배일 뿐이라는 맑스의 정식화(MEW 25, S. 390, 456)는 '발생에 대한 효력의 우위'라는 논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고용노동과 기타 활동의 구분의 강고한 현실성, 실제적인 사회적 효력이 사라진다면, 곧 고용되어 있다는 상태가 고용되지 않은 상태와 큰 구별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착취와 수탈의 구분에 대해 맑스와는 달리 - 하지만 맑스의 방법에 충실하게 - 새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용상태와 실업상태의 구별이 현존하는 노동사회를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이루는 현 상태에서 두 가지 구분 너머의 '단일성'으로서 '사회적 노동'과 '사회적 임금' 범주를 등장시키는 일은 '모든 사회적 부는 인간 활동의 산물이다'는 당연하기 짝이 없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단일성'은 상이한 투쟁들이 임금노동 범주를 뛰어넘는 요구를 제기한다는 "우연의 일치"(H&N 2000, p. 262-3)만을 만들어 낼 뿐, 임금노동의 범주를 뛰어 넘는 상이한 투쟁들을 전통적인 임금 범주와 결합시킬 전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4. 기본소득과 노동사회 재구성

 

문제는 노동사회의 내재적 구분인 노동/활동의 구분 속에서 어떻게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요구를 통해 이와 같은 구분을 넘어설 것인가이며, 이는 '노동자'와 '살아 있는 인간 모두'의 공통된 요구인 기본소득의 보편성과 단일성을 어떻게 이론적 실천적으로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과제는 기본소득과 임금노동 범주를 조우하게 만들며, 이는 기본소득 운동이 최저임금 인상운동, 노동시간단축운동, 비정규직 철폐운동 등 다른 요구들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점(김세균, 2010: 강남훈, 2010)을 지시한다.

 

기본소득 운동은 임금노동이 축소되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유의미성을 가진다. 즉 기본소득 운동은 노동시간의 혁명적인 단축 없이는 완전고용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의 반영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기본소득을 통하여 노동시간의 혁명적 단축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확립되며, 그리하여 노동시간단축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더 적게 일하면서 더 골고루 일하게 되는 완전고용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금민, 2010)과 함께 기본소득 도입 운동은 현존하는 노동사회에서 현실적 보편성의 차원을 획득한다. 기본소득 운동을 탈노동 패러다임에 일면적으로 정초하는 일은 기본소득을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시대의 필수적인 복지대안으로만 사고하도록 하며 기본소득의 포괄적 사회대안으로서의 의의를 축소시킨다.

 

<문헌>

Boron, Atilio A., Empire & Imperialism: acritical reading of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Zed Books, London and New York 2005.

Hardt, Michael and Antonio Negri, Empire, Harvard University Press, Massachesetts and London, 2000.

Negri, Antonio,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 translated by Harry Cleaver, Michael Ryan, and Maurizio Viano. Bergin and Garvey, South Hadley,1991.

강남훈(2010), 기본소득 도입 모델과 경제적 효과, 8월 19일 기본소득학술대회 발표문.

금민(2010), 노동자운동과 기본소득, 울산기본소득네트워크 초청강좌 발표문.

김세균(2010), 「기본소득 보장론, 어떻게 볼 것인가?」, 『진보평론』 44호(2010년 여름호).








하나인 다중(UNA SOLA MOLTITUDINE):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 그리고 이탈리아, 영국 및 일본에서 도출된 공통 논리

 

  

야마모리 도루 (기본소득일본네트워크 사무국장, 도시샤대 교수)

 

  

1. 서언

 

“우리 모두는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기본소득 / Renta Basica, 시민소득 / Reditto di Cittadinanza, 보장소득 / Revenu Garanti, Revenu D'Exxtence, Allocation Universelle 등.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러한 요구를 다중의 3대 정강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상황에 대응하여 쓰여졌다. 첫째, 하트와 네그리의 비판자들은 이 요구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근래 이 요구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발전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이 요구의 뿌리 중 하나가 1970년대의 급진적 풀뿌리 운동이라는 사실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곤 거의 무시되고 있다. 셋째, 이번 회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탈리아의 Lotta Feminista, Autonomia Operia 및 기타 운동의 경험들은 인민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사례로 인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바깥의 경험은 널리 인식되지 않고 있다.

 

이 글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요구를 둘러싼 최근의 학문적 담론을 소개할 것이다 (2절). 이를 통해 하트와 네그리의 비판자들이 지닌 오해를 지적할 것이다. 이후 1970년대 이탈리아의 투쟁을 잠시 언급하면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을 소개할 것이다 (3절). 다음 기본소득을 둘러싼 몇몇 회의적 시각을 검토할 것이다 (4절). 기본소득은 제국의 책략인가? 그럴 수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도입의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이러한 사례로 영국(5절)과 일본(6절)의 경험을 살펴볼 것이다.

 

 

2. 기본소득에 대한 최근의 담론

 

2.1. 다수의 이름, 하나의 내용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보장소득에 대한 요구는 상이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주로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인데, 이는 이 용어가 학문 공동체 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다는 사실 때문일 뿐, 이 용어 또는 학문적 담론에 특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는 점을 밝혀 둔다. 기본소득에 대한 최근의 담론은 한 학문 공동체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서 1986년의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모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조건 없는 보장소득이다. 필립 반 빠레이스는 이를 “정부가 사회의 모든 성인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단일한 수준의 정기적인 소득”이라고 정의한다. 기본소득은 “부자 또는 빈자, 홀로 사는 자 또는 공동생활을 하는 자, 근로의욕이 있는 자 또는 없는 자에 상관없이” 지급된다 (반 빠레이스 2001, p. 5). 기본소득이 “기본적”이라 불리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 것은 기본 수당으로서 “기타 소득이 - 그 형태가 현금이든 현물이든, 그 원천이 노동이든 저축이든, 시장이든 국가이든 상관없이 - 합법적으로 추가될 수 있다 (반 빠레이스 2001, p. 6)." 둘째, 그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셋째, 그 것은 "인간의 기본권"에서 유래한 권리이다. "보장 소득"이란 명칭은 기본소득과 현존하는/존재했던 복지국가 제도의 차이를 간과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데 (참고. Boron 2005), 복지국가의 주된 목표 중 하나가 "최저 소득 보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장 소득"이란 명칭이 복지 국가의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자, 최저 소득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류 시민"의 존재를 드러낸다고도 말할 수 있다. "allocation universelle[보편수당득]"이라는 명칭을 통해, 기본소득과 기존 복지 체계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볼 수 있다.

 

2.2. 연속성 및 불연속성

 

먼저 연속성의 측면부터 고찰해 보자. 기존 복지 국가의 직접 소득이전체계는 사회보험, 사회부조, 사회수당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급여로 구성된다. 사회보험은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기여 (예. 일정 기간 동안의 월별 기여금) 및 자격 (예. 일터에서의 부상). 사회부조는 몇 가지 테스트를 통과할 것을 요구한다: 수입 조사, 일자리 조사 및 (보통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행태 조사. 사회수당은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닌, 특정 범주에 속하는 사람에게만 지급된다. (예. 자녀 양육자 / 일정 연령 미만 아동). 이론적으로 기본소득과 사회수당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사회수당의 지급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면 기본소득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즉, 사회수당에서 보편수당(allocation universelle)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불연속성의 측면을 보자.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복지 국가의 특징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3가지 소득이전 방법은 결코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그 중 사회보험이 복지국가의 핵심에 위치한다. 보험체계는 사람들의 삶 속 “리스크”를 보장한다. 여기서 리스크는 일시적이라고 가정된다. 사람들이 (복지국가의 계획자들은 이를 “남성 가장”이라고 인식했다.) 장기간 동안 임금노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일을 해야 했고, 할 수 있다고 인식됐다. 일부는 복지국가를 케인지언-베버리지 복지 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케인즈 경제학 이론이 “일을 할 수 있다” 측면에 부합한다면, 윌리엄 베버리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일을 해야 한다” 측면에 부합한다.

 

국가는 시민들의 피할 수 없는 소득의 중단에 대비하여 적절한 혜택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민들이 일체의 합리적인 직업기회를 찾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할 수 있다.

 

따라서 기타 두 방법은 (사회부조 및 사회수당) 최소한 규범적 측면에서 보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의 주된 사회부조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보조 수당”이라 불린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일 해야 한다”는 규범은 사회 부조 청구자들을 “이류 시민”으로 낙인찍는다. 품위 있는 사회 보험을 수령하는 “일류 시민”과 사회 보험을 수령할 수 없거나, 그 것만으로 “리스크”를 적절히 보장받지 못하는 “이류 시민”으로의 구분은 젠더와 인종 간 구분으로 이어진다. 적절한 사회 보험 프로그램이 통상 안정적인 정규직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위와 같은 구분은 “1차 노동 시장” (공식 부문의 안정된 고용)과 “2차 노동 시장” (공식 및 비공식 부문의 불안정 고용) 및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자간의 구분을 반영한다. 많은 여성들이 후자에 속한다 (Fraser 1997, 2장). 똑같은 설명이 인종 간 구분 및 장애인/비장애인 구분에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기여라는 개념이 복지 국가에서 필수적임을 알 수 있으며, 임금 노동은 이 개념의 핵심이다. 직업에 우위 또는 의무를 부여하는지 여부의 측면에서, 기본소득은 우리가 아는 복지국가와 확연히 다르다. 다양성이 일부 존재하기 하지만, 기본소득은 조건 없이 소득을 보장한다. 몇몇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기타 소득 이전 일체를 폐지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일부는 보완적인 소득 이전 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하트와 네그리의 비판자들은 두 사람의 기본소득 옹호가 복지국가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Boron 2005, pp. 89-90).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임금 노동에 대한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차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 주장의 핵심에 위치한다. 이 문제는 추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3. 다중의 정강 및 이탈리아의 경험

 

하트와 네그리는 기본소득을 다중의 3대 정강 중 하나로 제시하면서 (H&N 2000, 4장), “빈곤에 대항한 구성적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했다 (H&N 2004, p. 136). 앞서 살펴보았듯 기본소득의 요구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정당화의 근거는 단일하다.

 

사회적 임금에 대한 요구는 자본의 생산에 필요한 모든 활동이 동등한 보상과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킴으로써, 사회적 임금이 사실상 보장 소득이 되게 한다. (H&N 2000, p. 402)

 

현재의 생산방식 하에서 - 즉, 생체정치적 생산방식 - “자본의 생산은 사회적 삶 그 자체의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수렴하고 있다 (H&N 2000, p. 401).” 따라서, (1) 산업노동자 계급만이 아닌, 가정주부와 실업자를 포함한 다중 전체가 가치를 생산한다, 그리고 (2) 이 가치는 전통적인 노동가치설로 측정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다중은 보장 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제국에서 전개한 논리를 통해, 모든 이를 위한 보장소득의 제공 (즉, 기본소득)이란 결론에 직접 도달할 수 있으며, 사회적 임금을 경유할 필요는 없다. 하트와 네그리가 사회적 임금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탈리아의 경험 및 이를 언급한 네그리의 초기 저술을 통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노동 거부”는 공장 노동자, 실업자, 학생, 가정주부 등 다양한 단체들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슬로건이었다. 이들은 임금 노동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또 다른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 또한 보상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주부를 위한 임금”을 요구했다 (Bono and Kemp 1991). (임금을 받지 못하는 또는 비가시적인 노동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 이러한 정치 운동은 이탈리아 다중의 요구가 왜 사회적 “임금”의 형태를 택했는지 설명해준다.

 

그것이 (기본 “소득”이 아닌) 사회적 “임금”의 형태를 띈 또 다른 이유는 네그리의 노동 거부에 대한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 거부에 대한 네그리의 초기 이론화 작업은 마르크스 독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맑시스트”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형태의 소요 및 저항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저자는 지금도 어려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직업/노동의 자연화 또는 신비화”라고 부를 수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독해한 후, 네그리는 우리가 구출할 수 있는 노동 개념은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맑스는 노동의 폐지를 주장했다. 해방된 노동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네그리 1991, p. 165)"라고 결론 내린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사회적 임금 보다 기본소득을 직접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네그리가 시도했던 것은 노동 거부를 맑스의 전통 속에서 정당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맑스 독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후일 하트와의 공동 저술에서 밝히듯이 (Diane Elson의 저술을 참고하며)(H&N 1994, p. 9), 노동가치설은 또한 가치노동설이다. 전자가 설명력을 잃고 있다면, 후자는 다양한 운동들의 단일성을 보게 해준다. 보통 맑시즘 용어로 설명되는 전통적 계급투쟁과 후기 구조주의 용어로 설명되는 새로운 사회운동 사이의 이분법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며, 사실은 두 운동 모두가 노동 그리고 가치의 정의를 둘러싼 투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적 맥락에서, 그리고 이탈리아의 현실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에 도달하기 전에 사회적 임금의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4. 제국의 책략?

 

2절에서 언급했듯이, 기존의 복지국가와의 불연속성 여부는 임금 노동의 지위에 달려있다. 임금 노동은 복지국가의 핵심에 놓여있지만, 기본소득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본소득에 대한 대부분의 회의적 시각은 이 문제를 두고 발생한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사람들은 노동을 멈출까? 이것은 노동권의 부정이 아닌가? 이는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위협하는 제국의 책략이 아닌가? 제도로서의 기본소득에 기반할 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기본소득을 개념화하는 복수의 상상력을 통해, 복수의 대답에 도달할 것이다.

 

4.1. 임금 노동에 대한 이윤동기에 대하여

 

먼저, 기본소득의 중립성에 대한 논의가 존재한다. 자유주의자들의 황금율은 사회제도는 개인의 선호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 체계는 노동과 여가에 대한 개인의 선호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으며, 노동에 대한 선호를 중시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일부 비판자들은 그 것이 임금노동에 대한 이윤동기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윤동기를 감소시키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회 제도는 개인의 선호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이윤동기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기본소득 옹호자인 필립 반 빠레이스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반 빠레이스 1995).

 

둘째, 일부 옹호자들은 임금 노동에 대한 이윤동기가 적다는 점에 찬성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이를 정당화한다. 일부 생태론자들은 임금노동의 이윤동기가 감소되면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전환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참고. Gorz 1999).

 

셋째, 감소된 이윤 동기는 하트와 네그리도 환영한다. 임금 노동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노동에 대한 이윤 동기를 가질 필요가 과연 있을까?

 

4.2. 기본소득의 모호한 효과

 

기본소득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위협하는 제국의 책략이 아닌가? 답은 예, 아니오 모두다. 이런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불안정 노동을 정당화하고 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훼손한다고 본다. 먼저, 동일한 맥락에서 일부 노동단체들의 “완전 고용”, 및 “동일노동 동일임금” 주장 및 임금 노동에 기초한 그들의 연대는 일을 하지 않거나 또는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어떤 요구의 긍정적 측면은 그 구체적 맥락을 살펴봄으로써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둘째, 일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지배라는 특별한 맥락에 대해 우려를 제기한다. 그 것은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더 적은 보수를 지급한다. 자칭 신자유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부의 저소득층 보조금(negative income tax)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일부는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적 산물 또는 제국의 책략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노동자 권력”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된 것처럼 기본소득도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악용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1968년의 급진적 운동을 면밀하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관료주의적 국가에 대항한 자유와 같은 그들 요구의 대부분이 후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악용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들이 요구했던 것들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그 어떤 진보적인 저자도 1795년에 도입되어 30년간 지속된 영국의 스핀햄랜드 체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 체제는 생존 비용과 임금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소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해주었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이 제도로부터 소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덜 지급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노동자들이 타락하게 되었다는 비판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규범적 평가는 시장경제에 대항했던 저항의 존재를 감추고, 미처 실현되지 못했던 빈민층의 해방 가능성을 은폐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을 받기 시작했다는 비판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에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 스핀햄랜드 체제는 노동조합 또는 일체의 노동자 연대를 금지하는 법과 함께 도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지배계급은 빈자에게 잠재적으로나마 권력을 주는 스핀햄랜드 체제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법안과 함께 이 체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본소득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요구들을 타협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될 맥락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법안이 기본소득과 함께 도입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풀뿌리 운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이 글에서 이 문제까지 다룰 수는 없다. 대신,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사례 이외에 두 가지 투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5. “임금체제 철폐”: 영국의 클레멘트(Claimants: 청구인) 조합

 

클레멘트 조합 운동은 1960년대 말경, 영국에서 등장했다고 알려져 왔다. 여기서 “클레멘트”는 다양한 사회적 혜택 및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연금생활자, 장애인, 환자, 사회부조 수령자, 미혼 부모, 학생, 실업자 등이다. 기존에는 이들에게 공동의 이해관계가 없다고 인식되어 왔지만, 클레멘트 조합은 동일한 적, 즉 사회보장부(department of social security)와 동일한 요구, 즉 기본소득을 통해 공동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표출하고자 했다. 집단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클레멘트 조합이 그러한 정체성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조합의 출판물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금생활자를 위한 핸드북의 서두에서, 클레멘트 조합은 “우리 / 우리의”가 의미하는 것이 단지 연금생활자가 아닌 모든 청구인(claimant)임을 강조하였다 (전국 클레멘트 조합 연합, 발행년도 미상)

 

그들은 자신들의 슬로건이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에서 “임금체제 철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클레멘트 조합 연합, p. 5). 그들은 임금노동과 결합된 성별 노동분업 및 노동윤리에 근거하여 무보수 노동에 문제제기 했다. 노동 윤리는 복지 국가만이 아닌, 자선단체 및 기타 봉사단체 등의 “빈민 사업”이 함께 부과한 것이었다.

 

이 핸드북은 “전국 클레멘트 조합 연합”이 작성한 것인데, 이 연합은 “함께 동맹을 결성한 모든 클레멘트 조합들의 네트워크”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들은 “클레멘트 헌장”이라고도 알려진 4가지 공통된 요구를 공유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수입 조사 없이 모든 사람들의 적정한 소득을 받을 권리

2. 모든 필수재가 무상으로 공급되며, 인민들이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

3. 비밀의 금지 및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권

4. 소위 “자격자” 와 “무자격자”간의 구분 폐지

(전국 클레멘트 조합 연합, p.3)

 

첫 번째 요구는 기본소득에 대한 것이며, 연금생활자들의 13개 요구에서도 다음과 같이 첫 번째로 언급되었다: “자유로운 복지 사회, 보장된 적정 소득에 대한 개인의 권리 (전국 클레멘트 조합 연합, p. 37)." 당시의 복지국가는 인민을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에 비판받았다.

 

불행히도,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 운동에 도입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신, 한 지역 클레멘트 조합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잉글랜드 남서부의 Newton Abbot에서, 한 클레멘트 조합이 1971년 발족되어 4년간 지속되었다. 이 조합은 3가지 점에서 전형적인 클레멘트 조합과 차이를 보인다. 첫째, 규모면에서, 운동의 절정기에는 약 400명의 사람들이 이 조합에 가입했다. 따라서 클레멘트 조합의 평균 규모와 비교할 때 상당히 컸다. 둘째, 계급 구성에서, 비서를 제외하면 어떤 중간계급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 지역에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다음 두 가지 점은 전국 연합 회의에서 기타 클레멘트 조합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농지에서 야채 기르기(타 조합들은 일체의 노동을 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비조합원인 비서 봉사자를 운영하기 (타 조합들은 조합원이 아닌 사람을 포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합의 초창기에 열린 한 주간회의에서, 다른 조합들에서 기본소득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았던 몇몇 멤버들이 회의 자리에서 기본소득을 논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다른 멤버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일부 반대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의 중에 어떤 반대도 제기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진실로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후일 비서는 나에게 그 것은 유쾌한 놀라움이었으며, 사람들의 지지가 없을 것이라고 의심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몇몇 전(前) 조합원들은 멤버들이 실업, 질병 및 장애 때문에 인간적 삶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동일한 믿음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통 노동자들은 안정된 일자리 또는 자기가 속한 계층에게 충분한 수당을 줄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Abbot의 클레멘트 조합은 기본소득을 공동으로 요구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 조건이며, 다른 하나는 주관적 인식이다. 첫째, 조합원 모두는 강제로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었다는 공통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동시에 임금노동에 접근할 가능성은 조합원마다 상이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 때문에, 그들은 실업자 또는 노동조합의 통상적인 요구인 일자리 보장 혹은 특정 계층에게 특정 수당을 지급할 것에 매몰되지 않고, 기본소득이라는 보편적 요구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에게 계급적 분열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노동자와 클레멘트(청구인) 사이에도 존재했다. 노동자들이 창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이 전적으로 틀린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록 이런 주장은 신자유주의 지배하에 더욱 창궐했다) 클레멘트가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도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좌파 사이에서 이 담론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객관적 물리적 조건만으로 집단적 계급 정체성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이 것이 필자의 두 번째 요점이다. Newton Abbot 조합의 경우에, 경작 또는 시위와 같은 공동의 활동을 통해, 조합원 각자의 다양한 상황을 존중함과 동시에 클레멘트로서의 공동의 정체성/주관적 인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통의 이해관계와 주관적 인식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단기 실업자였던 젊은 조합원들이 일터로 복귀하면서, Newton Abbot 클레멘트 조합은 대부분의 활동적인 조합원을 잃었다. 조합은 1975년 해산되었다. 대부분의 클레멘트 조합들 역시 1970년대 중반에 활동을 중단한다. 비록 일부가 후일 클레멘트 운동을 재개했고,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몇몇 시도가 존재했으며, 두어 개의 클레멘트 집단이 오늘날에도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기본소득 요구는 더 이상 그들의 정강에 들어있지 않다.

 

 

6. “삶이 곧 노동이다.” 푸른잔디 및 일본의 장애인 운동

 

이제 동일한 요구에서 동일한 정당화 논리로 초점을 돌려볼까 한다. 제국에서 기본소득의 정당화 근거를 보았을 때,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 운동의 표현들이 떠올랐다. “뒤척이는 것이 노동이다.”, “삶 자체가 곧 노동이다.” 등등이 그 것이다. “통제 거부” 또한 그들의 핵심 주장이었다는 점에서, 장애인 운동은 클레멘트 조합 운동과 유사점을 지닌다. 장애인 운동도 일종의 기본소득을 요구했다. “우리 모두는 조건 없는 보장소득에 대한 권리가 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사실 “장애인”을 의미하며,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탈리아 및 영국과의 유사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1970년경, (장애인들을 “위한”, 또는 장애인들을 “대신한”이 아닌) 장애인들의 운동은 과거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일어났다. Tomoaki Kuramoto는 이 새로운 흐름을 “장애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차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요약했다 (Kuramoto, 1997). 1950년대 상호부조 단체로 출범한 Aoi shiba no kai는 (영어로 직접 번역하면 푸른잔디 공동체임. 이하 푸른잔디) 1970년경 급진적 행동단체로 변화했다. 1970년 처음으로 등장한 조직 정강은 설득력 있게 그들의 사상을 설명한다.

 

1. 우리는 스스로를 뇌성마비자로 규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지위를 현대 사회에서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이 운동 전체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 믿음 위에서 행동한다.

 

2. 우리는 공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스스로를 뇌성마비자로 규정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강한 자기주장만이 자기보호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 위에서 행동한다.

 

3.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거부한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가 상징하는 에고이즘을 비난한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관찰이 가능해지며, 여기서 비롯된 상호이해만이 진정한 행복을 의미한다고 믿고, 이러한 믿음 위에서 행동한다.

 

4. 우리는 문제해결 방식을 거부한다.

 

우리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쉬운 해결책은 위험한 타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끊임없는 대립만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행동방침이라고 생각하며, 이 믿음 위에서 행동한다.

(Aoi Shiba no Kai Kanagawa Rengo Kai, 1970)

 

푸른잔디는 대다수 비장애인과 시스템을 상대로 저항하는데, 이 둘은 모두 '중증 장애인은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장애인 아동을 살해하는 부모들에게 동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들에게 이는 사회 대다수의 편견 때문에 초래된 현실적 위협이었다 (“내 부모는 언제 나를 살해할 것인가?”). 하지만 이와 같은 인식을 내면화하는 것은 자기긍정을 어렵게 만든다. 정강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주장은 이러한 상황에 맞서 싸울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그들의 요구를 잘 요약해준다. 푸른잔디는 장애인들이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부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부정은 이러한 생산양식이 형성한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고정되고 강요된다”고 보았다 (Kansai Aoi Shiba no Kai, 1975). 그들이 사랑과 정의를 부정할 때, “사랑”은 이러한 인식, 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것처럼 자식들을 죽이는 부모의 “사랑” 또는 장애인들의 자율성을 부인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선의”를 의미한다. “정의”는 현 시스템, 즉 장애인을 분리하고 통제하는 복지국가를 의미한다. 그들은 특수기관에 입실되기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독립된 삶”을 시작했다. 그들은 “통합” 교육을 요구했다. 복지 정책, 법 및 우생학에 근거한 의료행위는 비판받았다. 특수기관 밖에서 살기 위해, 달리 말하면, 비장애인과 같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대중교통수단 접근권부터 소득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요구해야만 했다.

 

네 번째 부분은 그들의 전략을 잘 설명해주는데, 시간의 제약상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생략한다. 단,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부연하고자 한다. 상기 정강에서 잘 드러나듯이 (특히, 첫 번째와 네 번째), 푸른잔디의 정치를 정의할 때, 근대 정치철학의 용어를 빌려 “차이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로부터 그들이 단지 분리주의자이며, 비장애인 다수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면 그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노동자들의 역사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우리와 노동자간의 상호비판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위한 정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비장애인의 문제를 작업장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변혁한다 (이탤릭은 필자).”

 

“노동의 가치를 변혁한다”는 것은 기본소득을 정당화한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한다. 생활을 위한 소득 및 개인별 사회 부조 지급은 1980년대 창설된 개인 부조 보장을 위한 전국 클레멘트 조합이라는 명칭의 또 다른 단체가 주로 추구했던 것이다. 이 단체 외에도 기본소득과 유사한 요구를 제기한 단체는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푸른잔디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광범위한 이슈에 대해 투쟁해왔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위해 싸운다는 점에서 “평범”하지만, 동시에 사회 대다수와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삶이 곧 노동이다”와 같은 형태로 표현된 그들의 논리는 네그리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둘째, 네그리 및 Autonomia와의 차이는 푸른잔디의 강조점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양한 클레멘트 사이에 공동의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던 영국의 클레멘트 조합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클레멘트 조합 역시 클레멘트와 노동자간의 차이를 강조했다. 영국의 클레멘트 조합 그리고 일본의 푸른잔디가 채택한 차이의 정치학은 노동자 (전자) 및 비장애인들 (후자)의 지배적 인식에 대항한 투쟁을 외쳤다. 이러한 점에서 두 개의 투쟁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7. 결언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운동은 (각각의 운동도 복수의 운동이다) 핵심 운동 주체의 정체성이란 면에서 서로 상이하다. 또한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운동 속에서 유사한 요구 및 동일한 정당화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제국의 다음과 같은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필연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잠재적 또는 실질적 통합을 창출한다. 이 실질적 통합전 지구적 정치 연합으로 완전히 실현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효과를 지녔다. 달리 말하면, 실질적이고 의식적인 국제 노동조합이 거의 출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극단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국제적 통제 레짐에 대항하여 일어난 서로 중첩되는 투쟁들이 존재한다는 객관적 우연의 일치가 가장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H&N 2000, p. 262-3)

 

이러한 “투쟁들의 객관적 우연의 일치”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실질적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이번 회의를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대신, 몇 가지로 결론을 짓고자 한다. 먼저, 네그리의 (그리고 후일 하트의) 노동 거부 이론화는 이탈리아 밖에서 우리가 목도한 운동들에서도 도출되었다. 따라서 네그리 (그리고 하트)를 비판하는 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이탈리아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축소하려고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은 필자가 소개한 기타 투쟁들을 무시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 기본소득은 제국의 책략일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이렇게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자는 이 글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을 제안한다. 이 역 사적 경험들을 점증하는 기본소득 학술 네트워크의 논의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이는 여러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기본소득 운동과 소통하고 참여하는 것의 핵심적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을 위해 투쟁해온 정치주체들은 “하나”이면서도 “다수”다 (Una Sola Moltitudine). 이런 경험이 다중의 정치에 지니는 함의는 논의할 가치가 있으며, 이번 회의 및 앞으로의 토론거리라고 생각된다.

 

 

감사의 말 및 주석

 

이 글의 초기 버전은 일본어로 출간되었다 (야마모리 [2003]). 초기 버전에 적은 감사의 말은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Newton Abbot 클레멘트의 전(前) 조합원들, Southsheilds 클레멘트의 전(前) 조합원들, Edinburgh 클레멘트 및 기타 클레멘트 운동의 조합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익명으로 남고자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실명 거론은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Bill Jordan 및 Jack Grassby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의 저서 (Jordan 1973 and Grassby 1999)는 클레멘트 조합 운동에 대한 소중한 기록물이다.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 그들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일본에서의 투쟁에 대한 부분 (6절)은 (역설적이게도) 캠브리지로 옮긴 후 거의 새로 쓰여진 것이다. 장애인 운동에 관한 홈페이지 및 Shinya Tateiwa가 주로 집필한 연구들은 머나먼 캠브리지에서 사료들에 접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6절의 집필은 과거 그와의 교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재집필 과정에서, 캠브리지 자율연구 프로젝트 사람들과 제국을 다시 읽었다. 당시의 비판적 토론은 필자에게 네그리의 사상 중 무엇이 현대 자율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핵심적인지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Rosie Vaughan, Mishko Hansen 및 Thomas Lalevee에게도 따뜻한 격려와 도움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모든 오류는 필자 자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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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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