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kwacks79@hanmail.net)


 

1. 들어가기

 

2009년 2월에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를 출간하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cafe.daum.net/basicincome)’가 개설된 이래, 한국에서도 기본소득 논의가 진보학계와 진보사회운동‧정치진영 내에서 커다란 논쟁주제로 부상했다. 사회운동과 정치진영에서는 사회당이 얼마 전 기본소득을 부속강령으로 수용하였으며, 교수노조도 최근에 3대 정책의 하나로 기본소득을 채택했다. 아마도 2009년은 기본소득운동이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닻을 내리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2010년 들어서는 다함께가 이행기강령에 기본소득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본소득충남네트워크, 기본소득울산네트워크(준) 등이 결성되는 등 각 지방으로 기본소득네트워크가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사람연대‧민주노동자연대·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기본소득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진보신당·민주노동당에서도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가 심화되고 있다. 또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를 창설한 벨기에의 판 빠레이스(Van Parijs)와 브라질의 기본소득제도를 법제화한 수플리시(Suplicy) 상원의원, 독일 좌파당의 블라슈케(Blaschke) 및 국내의 민주노총, 사회당,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에서 다수의 기본소득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기본소득국제심포지엄이 2010년 1월 27-8일 양일간 서울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어 일간지와 인터넷 언론을 통해 기본소득이 공론화될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국제학술대회는 위에 열거한 단체뿐만 아니라, 민주노동자연대, 전국사무연대노조, 교수노조, 전국장애인운동연합,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사회대안포럼, 진보평론, 아카데미아코뮤닉스, 사회과학아카데미, 수유+너머N, 다중지성의 정원, 연구공간 L 등 사회운동 및 진보적 학술단체와 여러 대학의 연구소들의 공동주최로 개최되었고 이틀간에 걸쳐 약 700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역동적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도 기본소득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 토지세 등을 통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모델을 제시한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는 달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단일한 고율의 소득세율을 통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기본소득인가’로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어쨌든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은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여러 진보적인 사회운동 및 정치진영을 가로지르며 지구공동체에서 지방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연대의 폭을 넓혀가고 있으며 진보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이 닻을 내린지 채 1년여밖에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작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이 진보적인 활동가들과 연구자들로부터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진보적 활동가들이나 연구자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또는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는 않더라도 아직 잘 모르는 상태이므로 판단을 보류하거나, 취지는 좋지만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기본소득운동의 적극적인 주체로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진보진영에서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논거는 대체로 3가지 차원의 오해에서 제기된다.


첫째의 차원은, 기본소득 자체를 체계적으로 오해하는 경우이다. 그 중에는 기본소득이 마이너스소득세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인 기획일 뿐만 아니라 의료‧교육‧보육‧주택‧돌봄서비스 등 현물복지를 모두 현금으로 대체하는 현금지상주의라는 주장 등이 있다. 하지만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마이너스소득세는 기본소득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복지모델이고, 보편적인 현물복지를 모두 현금복지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기본소득 옹호자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선입견에 치우친 단견이라 할 수 있다. 


둘째의 차원은, 자신이 이해하고 반대하는 특정 기본소득론이 기본소득(운동)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다양한 지향의 기본소득(운동) 전체를 반대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기본소득은 최저임금제‧정규직제도‧파업권의 폐지 등 노동유연화를 전제하며 노동보다는 다른 활동을 보다 우위에 놓는 반노동적 기획이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해가 된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사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노동보다는 다른 활동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판 빠레이스 등 기본소득의 주창자들 중 일부가 노동을 유연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소득이 도입되고 기업의 협동조합화 내지 사회화 등을 통해 기존의 자본-임노동 관계가 사실상 거의 사라지며 노동자들이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는 시점 이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자기가 주인인 기업에 대항해 파업을 하거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점에서 판 빠레이스의 주장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정당한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협동조합화나 기업의 사회화를 지향하지 않으며 자본-임노동 관계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노동유연화가 전제된 기본소득을 주창한 베르너(Werner) 등은 부분적으로 반노동적 기본소득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하는 지구적 차원에서의 기본소득운동은 압도적으로 베르너 등의 반노동‧친자본적 흐름과는 반대되는 진보진영에서 추동되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 전체가 반노동적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억지이다. 이 중에는 호워드(Howard), 담(Dahm), 라이트(Eric O. Wright), 키핑(Kipping), 블라슈케, 와이더퀴스트(Widerquist), 라이터(Reitter), 스탠딩(Standing) 등 노동운동을 강화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설 기획으로서의 급진적인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셋째의 차원은, 한국의 기본소득운동 및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제시한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의 차별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를 자신이 이해하며 반대하는 특정 기본소득모델로 환원하여 비판하는 경우이다. 앞서 말한 한국의 기본소득모델과 운동은 노동소득세 증세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자본주의적 불로소득(이자‧배당‧지대) 및 투기소득(증권양도차익‧부동산양도차익) 등에 대한 과세를 대폭 강화하거나 신설하여 재원을 확보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인구의 90%와 정규직의 압도적 대다수에게도 추가로 내는 세금보다 기본소득으로 받게 될 금액이 크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증권가격과 부동산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사회적 총자본을 전체사회성원의 소유로 전환할 계기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본소득모델들과 다른 차별성을 갖고 있다. 곧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면서도 노동자뿐만 아니라 압도적 대다수의 사회성원들에게도 이득이 되며 따라서 기본소득운동의 잠재적 주체를 최대로 확장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조건을 최대한 확대하고자 하는 모델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운동의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한국의 기본소득 모델이 반노동적 기획이라고 오해하며 그러한 오해에 기초하여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오해에 기인하지 않는 비판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중에 기본소득모델과 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비판도 있다. 그러한 비판은 기존 한국의 기본소득모델 및 운동의 자기혁신을 위한 소중한 원천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비판들을 감안하여, 기존 기본소득 논의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기존 모델에서 불분명하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소득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논제를 분명히 하는 것과 ‘기본소득과 노동운동’의 상생가능성과 비전을 제출하는 것은, 기존의 논의를 한 차원 심화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일 것이다.   


 

2. 기본소득 vs. 기본보장‧기초생활보장

 

서유럽 특히 독일에서 2006년 이래 기본소득 담론의 대중적 확산은 독일의 보수당인 집권 기독교민주당 일각에서조차 기본소득과 유사한 ‘연대시민급여’의 도입을 적극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 기본소득이 실험적으로 실행된 바 있다. 특히 조만간 실험적 차원을 넘어서서 전국적인 차원에서 브라질 및 몽골에서 기본소득을 실행된다. 이제 곧 기본소득은 담론이나 실험에 그치지 않고 지구의 일부분에서는 전국적인 현실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 논의와 운동은 전지구적 차원에서도 더욱 비약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7년 미국에서 시작된 전지구적 경제공황과 실업의 급증은, 진보적인 새로운 대안적 경제패러다임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현재 기본소득 논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차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차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원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공간에 중첩되어 있다. 이는 기본소득 논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드는 배경을 이룬다.

먼저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차원도 ‘보수인가 아닌가’라는 차원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선도 나라별로 다르다. 한국에서는 기본소득 담론이 현재 진보진영 내부의 논의로 국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는 ‘기본소득을 수용하는 진보인가 아니면 기본소득을 유보하거나 거부하는 진보인가’라는 경계선으로 갈라진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 논의가 활성화된 서유럽과 남미, 남아공과 나미비아 등에서 기본소득 여부를 가르는 경계는 보수·기독교·자유주의·녹색·보라·전통좌파·신좌파 각각의 내부를 가로지르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보수 내지 자유주의의 기본소득모델과 좌파의 기본소득모델은 다르다. 보수의 기본소득모델은 자본주의의 구원을 목표로 하며, 좌파의 기본소득모델은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획기적으로 변형시키는 대안경제체제를 목표로 하는 ‘트로이의 목마’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목표에 따라 여러 가지 기본소득으로 차별화되는 셈이다. 곧 현재 지구적으로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차원과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차원이 동시적으로 겹쳐 있는 상황이다.


판 빠레이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인별로 무조건적으로 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지급하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임노동자를 포함하여 외국인, 어린이, 청소녀(년), 주부, 실업자, 노령자, 장애인, 사회운동가, 자본가, 정치가 등 전체사회성원을 뜻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는 신청절차나 심사과정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누구나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 명쾌한 주장은 몇 가지 근본적인 논점을 내포한다. 왜 그것을 도입해야 하는가, 재원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가, 그것이 도입되면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큰가 아니면 부정적인 효과가 큰가, 왜 부자나 자본가들에게도 주어야 하는가, 기본소득을 통해 누가 손해를 보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 과연 이를 실현할 주체는 누구인가 등은 대표적인 논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차원과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차원이 겹쳐지면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점은 더욱 더 복잡해진다. 곧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변형할 대안경제체제의 밑거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겹쳐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변혁할 밑거름이 되려면 어떻게 재원을 조달해야 하며 어떤 다른 것들과 결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선 경제체제는 또 전통적인 사회주의 모델인가 아닌가라는 점도 동시에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논점을 담고 있는 기본소득담론에서, 이글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하며 또 어떤 것들과 결부되어야 하는 지에 논의를 한정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진보 내부의 논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 내부에서도 기본소득을 거부하는 논의가 만만치 않다. 그 중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입장은, 기본소득보다 기본보장(Grundsicherung)이 오히려 진보적이며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비숍(Bischoff) 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기본보장은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성인 내지 가족에게 그 차액을 정부가 지급해주는 제도로, 기존의 노동과 연계된 사회복지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기본보장의 수혜대상자는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을 올리거나 재산이 적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기본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소득 및 재산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기본보장은 가족단위로 받게 된다. 기본보장은 과거에 노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받게 되는 실업급여와 달리, 부분적으로 과거 노동에 상관없이 받게 되는 소득이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노동과 연계된 사회복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넘어서고 있다. 이는 대체로 독일어권의 좌파당 당권파‧사민당 좌파‧녹색당 당권파가 지지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백커(Bäcker), 탈로스(Tálos) 등 케인스주의 좌파와 비숍, 로트(Roth) 등 고전적 맑스주의자들 중 다수가 옹호하는 대안이다. 1988년부터 프랑스에서 시행되고 있는 최소통합소득(RMI-revenu minimum d'insertion)은 독일어권의 전통적 좌파들이 주장하는 기본보장에 비해 노동의무가 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거의 유사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이와 유사한 정책을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놓은 바 있다.


기본보장 내지 프랑스의 최소통합소득이 기본소득과 다른 점은, 소득과 재산심사를 받는다는 점, 가족단위로 받는다는 점, 노동의지 및 노동의무를 어느 정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Vanderborght/Van Parijs, 2005: 13, Blaschke, 2008: 1-2 및 5-8). 기본보장의 옹호자들은 기본소득에 대해 유난히 비판적이다. 그들의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논거는 1. 지나치게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기본소득이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다수를 얻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Bischoff, 2007: 100; Roth, 2006: 70 - Blaschke, 2006: 315에서 재인용), 2. 기본소득보다는 최저임금제의 강화와 노동시간단축, 임금인상 등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임노동중심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좌파의 우선적 과제라는 점(Bischoff, 2007: 95-100), 3. 기본소득은 임금축소를 조장하는 콤비임금의 일종이라는 점(Roth, 2006 - Blaschke, 2006: 304에서 재인용), 4.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사상이고, 신자유주의의 발명품이라는 점(Blaschke, 2008: 3에서 재인용) 등이다.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 사상이라는 기본보장 옹호자들의 주장은, 현대 기본소득의 체계를 정립한 판 빠레이스 스스로 기본소득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제출한다는 점에서 근거가 없는 억지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곽노완, 2009: 19). 뿐만 아니라 기본보장의 옹호자들은 신자유주의들이 주장한 마이너스소득세를 기본소득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밀턴 프리드만(Friedman) 등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마이너스소득세는 강화된 소득 및 재산심사를 전제로 하며 가족단위로 지급된다는 면에서(Vanderborght/Van Parijs, 2005: 52-53) 기본소득보다는 오히려 기본보장에 가까운 복지정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 사상이라는 기본보장 옹호자들의 주장은 적반하장인 셈이다. 그리고 기본보장의 논자들은 블라슈케(Blaschke)의 비판대로, 1. 관료적인 소득 및 재산심사를 강화하고자 하며 따라서 신청자들을 낙인찍고 사회적으로 배제하며(Blaschke, 2008: 1, 6-7), 2. 노동해방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임노동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따라서 사실상 시장과 자본을 보완하는 데 머물며(Blaschke, 2008; 5-6, Blaschke, 2006: 312-314), 3. 기본보장의 대가로 사후적이긴 하지만 노동의무를 어느 정도 강요함으로써 강제노동을 사실상 인정한다(Blaschke, 2008: 2). 또 기본보장은 현재보다 소득 및 재산심사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현재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 및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는 점도 기본보장이 갖는 결정적인 단점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곽노완, 2008a: 161). 


그리고 기본소득이 상식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실현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라는 기본보장 옹호자들의 주장은 현실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조만간 몽골과 브라질 전역에서 실시될 기본소득은 아직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기본보장보다 현실적 근거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기본보장론자인 비숍(Bischoff)의 국가 독일에서조차 2006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도는 기본보장에 대한 지지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고 따라서 실현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현재의 제도와 가까운 대안이라고 해서 보다 근본적인 대안보다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없으며, 더 많은 사회성원들에게 수혜가 돌아가는 근본적인 대안이 오히려 실현가능성이 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케인스주의 좌파와 상당수 전통좌파가 공유하는 기본보장은 자본주의를 넘어설 진보의 전망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에도 역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에는 이상의 기본보장과 유사한 제도로 2000년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있다. 한국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2009년 1인 가구 기준 월 49만 845원에 달하는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가구에 대해서 그 차액을 보전해 주는 제도이다. 하지만 최소생계비 자체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문제점뿐만 아니라(기본보장모델에 비해 1/3수준임), 앞서 지적했듯이 일정소득 이상을 올리는 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수급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광범한 사각지대를 조장하며(허선, 2009: 28) 따라서 기본보장보다도 오히려 퇴행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곧 한국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기본보장모델이 갖는 문제점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보다 광범한 사각지대를 낳는 문제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더 퇴행적인 제도인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설계한 연구자들조차 이의 다양한 문제점들과  그러한 문제점들이 사실상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이영환, 2009: 7-9; 허선, 2009: 15-33). 그리고 그 중 일부 연구자들조차 기본소득제도를 전향적으로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만큼(이태수, 2009: 44), 국민기초생활보장에 대한 논의는 기본소득논의에 의해 내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어떤 기본소득인가’이다.    

 
  
3. 좌파의 두 가지 기본소득 :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 vs. 코뮌주의로의 이행전략

 

이제 ‘어떤 기본소득인’라는 문제를 살펴보자. 완전한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입장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와 유사한 급진자유주의 입장에서 자본가인 베르너가 주장하는 모델이 있으며, 좌파케인스주의 입장에서 제출된 미드(Meade)의 아가토토피아 모델도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대안경제체제를 지향하는 모델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경제체제의 밑거름을 추구하는 진보 내지 좌파의 기본소득모델도 단일하지 않고 크게 보아 두 입장으로 차별화된다.

첫째로, 라이트(Wright) 등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내지 코뮌주의 제1국면)로의 이행전략으로 보는 다소 전통적인 입장이 있다. 그리고 이들도 차별적으로 세분화된다. 라이트와 캘리니코스(Callinicos)처럼 노동중심패러다임에 입각하여 생산수단의 전면적 사회화를 추구하는 입장, 노동중심주의와 탈노동패러다임을 절충적으로 결합하여 수용하는 키핑(Kipping)이나 블라슈케(Blaschke)의 입장, 호워드(Howard)처럼 시장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입장 등으로 갈라진다. 


둘째로, 초기의 판 빠레이스처럼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 코뮌주의(고차 국면)로 직행하는 전략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며, 분배의 문제나 소득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초기의 판 빠레이스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의 재생 내지 코뮌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1993: 156이하).   


먼저 사회주의적인 기본소득 옹호자들의 논의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여러 가지 차이를 갖지만 크게 보아 기본소득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이자 사회주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사회주의로의 이행 기준은 1. 자본에 비해 노동의 힘을 강화하는 것, 2. 노동력의 탈상품화, 3. 경제활동에 대한 사회적 권력의 강화 등 3가지이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수준의 후한 기본소득은 이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므로 사회주의적인 개혁이라고 한다. 후한 기본소득이 노동의 힘을 강화하는 이유는, 개별노동자들의 교섭력을 강화하며 일종의 파업기금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한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자가 더 이상 임금인상의 무기인 노동조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노동조합이 약화된다는 반대 주장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이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조직화, 노동조건 등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후한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기능이 위협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Wright, 2005: 3-4). 그리고 기본소득이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확대하는 이유는, 노동자가 후한 기본소득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임노동 시장 외부를 통해서도 자신의 필요품을 가질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앞의 글: 2 및 4). 또한 후한 기본소득이 경제활동에 대한 사회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이유는, 예술·돌봄활동·정치활동·지역사회운동을 촉진하며 이윤이나 국가의 기술관료적인 합리성을 벗어나 집단들이 스스로 필요를 위한 경제활동을 자기조직할 가능성을 제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앞의 글: 4-5). 이처럼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로의 세 가지 이행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사회주의적인 개혁이라는 것이다(앞의 곳).


이러한 라이트의 견해는 독일 좌파당 소속 연방의원이 키핑에 의해서도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다(Kipping, 2006: 5-6). 뿐만 아니라 키핑은 좌파의 기본소득 구상을 밝히면서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덧붙여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는 ‘추가적인 35% 소득세+사치품에 대한 조세+주요 에너지세’로 재원을 마련하여 외국인을 포함한 16세 이상의 모든 거주자에게 월 950유로(원화로 약 17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는 정책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소득 모델은 최저임금제 강화 및 노동시간 단축, 연금·건강·요양·실업 보험 유지, 장애인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 등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부유한 3분의 1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지만 나머지 3분의 2에게는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다수의 지지를 고려한 모델이다(Kipping, 2008: 3-4). 독일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발기인인 좌파당의 블라슈케에게서 보이듯이 이러한 모델은 에리히 프롬(Fromm) 등의 전통적인 노동중심패러다임과 하트(Hardt)와 네그리의 탈노동패러다임을 절충적으로 통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Blaschke, 2008: 4).
시장사회주의 입장에서 호워드도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자유의 왕국을 향한 일보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왕국은 그 기초로서 필연성의 왕국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모두를 위한 진정한 노동과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는 사회주의의 장기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Howard, 2002: 9) 그런데 호워드는 라이트나 키핑보다 명시적으로 노동중심패러다임을 거부하면서 기본소득 및 노동에 대한 권리를 동시에 주장한다(Howard, 2005: 133-134). 특히 그는, 기본소득은 게으른 사람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노동중심주의적인 좌파의 비판을 반비판하고 있다. 그는, 맑스는 교환가치는 노동의 결과이지만 부 또는 사용가치의 창출은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보았음을 밝히면서 그러한 비판을 반비판한다(Howard, 2005: 126). 나아가 기본소득을 자본주의에서 도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서도 지속되고 확장되어야 할 개혁으로 본다(앞의 글: 10). 그는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불로소득이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이는 이자, 배당, 지대 및 유산과 같은 불로소득을 종식시키는 기획으로서 사유재산의 철폐를 지향한 『공산당선언』의 취지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Howard, 2005: 128). 곧 그에게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기본소득이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Howard, 2005: 122). 


이들이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내지 코뮌주의 제1국면)로의 이행전략 내지 사회주의의 한 부분으로 보는 데 반해, 코뮌주의자인 초기 판 빠레이스는 1986년의 논문 「코뮌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에서 사회주의를 불필요한 것으로 본다. 네그리와 가라타니 고진이 사회주의에서는 코뮌주의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데 반해, 판 빠레이스의 경우 사회주의에서 코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지만 불필요하다고 보는 점에서 약간이 차이가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노동자집단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며 모든 사회적 생산물을 전유하는 체제이다. 이에 반해 코뮌주의는 각자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각 개인의 몫이 노동기여와 무관하게 분배되는 체제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왜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곧 왜 코뮌주의로 직행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코뮌주의의 가능성은 1) 생산력의 발전에 기인하며, 2) 이러한 발전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서 곧 생산수단에 대한 집단적인 소유권보다는 사적 소유권에 의해서 더 잘 제공된다는 주장을 편다. 그리고 맑스처럼 코뮌주의를 위해 이타주의의 발전이나 인간 본성이 변화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Van der Veen & Van Parijs, 2006a: 3-5).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계획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보다 노동을 더 빠른 속도로 절감함으로써 노동생산력의 발전을 더 빨리 촉진한다는 맑스의 가정은 맞지 않다고 반박한다. 곧 사회주의적인 계획이 자본주의적인 이윤극대화 방식보다 노동생산력을 더 빨리 발전시키는 기술을 채택할 것이라는 가정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근본적인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노동생산력은 자본주의 안에서 보다 급속히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앞의 글: 7-8). 그리고 이 핵심적인 변화를 보편적인 보장소득 곧 기본소득에서 찾는다(앞의 글: 10이하).  


그에 따르면, 노동소득에 더하여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매력적이지 않은 노동에 대한 노동력공급이 급감하여 급속히 기계화되고 각자가 보다 원하는 노동을 하게 시간당 노동생산력이 급증한다(앞의 글: 13 및 21). 그러면 생산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시간을 급속히 축소시키며 자유시간을 확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산수준 대비 기본소득의 비중을 꾸준히 증가시킴으로써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맑스의 코뮌주의 경제체제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앞의 곳). 2006년도에 다시 출간된 1986년의 이 논문에서 판 빠레이스는 맑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다른 한편 맑스의 코뮌주의체제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며 실현가능한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새롭게 논증했다(앞의 글: 21). 여기서 그에게 기본소득은 코뮌주의로 직행하는 이행전략이자 코뮌주의(1995년 이후 판 빠레이스는 코뮌주의보다는, ‘기본소득과 지분배당경제 내지 협동조합경제를 전제로 하는 최적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의 지배적인 경제원리이기도 한 셈이다.


그는 이렇듯 코뮌주의 내지 ‘최적자본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이행전략이자 코뮌주의내지 ‘최적자본주의’의 지배적인 경제원리인 기본소득이 착취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이상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는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의 경제원리보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로머(Roemer)의 착취 개념을 확장하여 생산수단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초한 타인의 노동 수익에 대한 부당한 전유뿐만 아니라 천부재능, 성, 나이, 건강 등의 차이에 근거한 노동수익의 차익에 대해서도 적용한다(Van Parijs, 1993: 89-109; 1995: 183). 이렇게 착취 개념을 확장하면,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개인의 신체와 능력에 포함되어 양도불가능한 자산도 착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런 양도불가능한 자산에 근거한 착취는 사회주의적 집단소유에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이처럼 우연적인 우월성을 갖는 신체와 능력에 기초한 노동수익의 차익을 환수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면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이상으로 착취를 더 잘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고용지대(employment rents)는 바로 이처럼 양도불가능한 우연적인 우월한 신체와 능력 및 일자리에 결부된 노동수익의 차익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하지만 고용지대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고용지대를 포함한 임금에 대해 적정 세율로 과세하는 것을 제안한다(앞의 책: 123-125). 물론 양도가능한 자연자원이나 생산수단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초한 착취와 증여·상속 등으로 인한 외적 자산 및 자연자원으로부터의 수익도 상당 부분 환수되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귀속되어야 한다(앞의 책: 101). 이러한 조건하에서 착취에 기반한 초과수익은 점차 줄어들고 기본소득의 상대적 비중이 늘어나면, 이는 사회주의보다 착취에 더 잘 대응하는 체제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판 빠레이스의 주장은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으로 간주하는 라이트나 호워드 등의 논의와 달리 코뮌주의 직행전략으로 보는 가장 체계적인 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 대 코뮌주의로의 이행전략으로 이분화된 기본소득모델들은 나름의 문제점을 갖는다. 우선 사회주의 이행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론은 이행 이후의 사회주의모델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한 ”목적지” 간주하거나(Wright, 2005: 1-2), 아니면 기본소득을 단지 정의와 도덕적 우월성의 차원에서만 근거지울 뿐 경제적 우월성은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Kipping, Blaschke, Howard).


이에 반해 판 빠레이스는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와 분리된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모순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가 실질적 자유와 결부될 가능성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처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및 기업창설의 자유 등 실질적 자유는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공유될 때만, 생산수단의 일부분을 생산자들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실질적 자유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유고의 자주관리에서 나타났던 연성예산제약의 문제를 방지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장치로는 기업별 생산 및 투자수익 중 일정비율(예를 들어 50%)을 사회전체 차원에서 필요에 따른 분배의 재원으로 귀속시키고, 나머지 비율(예를 들어 50%)을 기업별 노동소득으로 귀속시키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치를 도입하면 생산 및 투자수익이 제로 이하인 경우 해당기업 노동자들의 노동소득은 자동 소멸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노동자들은 사회전체성원에게 돌아가는 필요에 따른 분배 몫을 사회로부터 지급받는다. 어쨌든 이 경우 방만한 연성예산제약의 문제는 상당정도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곽노완, 2006b: 80).


판 빠레이스의 궁극적 기본소득모델이 갖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난점은 기본소득의 상대적 비중을 극대화하려는 그의 코뮌주의모델이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아 수용했던 맑스의 코뮌주의 경제원리는 ‘필요에 따른 분배’ 곧 기본소득이 가처분국민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리였다. 이는 예를 들면 가처분국민소득에서 기본소득이 90%를 차지하고, 노동소득은 5%, 자본 및 자산소득이 5%를 차지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각 개인의 노동유인 및 노동력 공급은 극소화될 것이고 이는 사회전체적으로 생산수준의 정체뿐만 아니라 절대적이 축소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기본소득의 상대적 비중은 크게 확대되었지만, 절대적 규모는 갈수록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는 게으른 사람들과 이기적인 사람들이 소수의 헌신적인 노동자를 과잉착취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종국에는 대다수 사회성원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절대적 빈곤을 재생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유로 이는 지속불가능한 체제라 할 수 있다(곽노완, 2007c: 197-198). 더구나 1995년 이후 고용지대와 관한 그의 입론은 고율의 노동소득세로 귀결된다. 그리고 스스로 이는 기본소득의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좋은 방안이라고 자신한다(Van Parijs, 1995: 90). 이는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서유럽의 가처분GDP 중에서 명목상 ‘노동소득:자본소득’의 비율이 ‘7:3’ 수준으로 노동소득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소득 비중은 한국의 ‘6:4’나 미국의 ‘6.5:1’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에 누락된 자본주의적 부동산‧금융 투기소득을 감안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부동산‧금융 투기소득은 대체로 최종적으로는 노동소득의 누출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정확히 측정할 순 없지만 서유럽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처분GDP의 30% 수준을 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기본소득의 또 다른 재원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판 빠레이스는 이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나친 고율의 노동소득세를 통해 기본소득 재원의 상당부분을 마련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노동유인이 급격히 감퇴하여 사회전체의 생산력이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신이 주창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자기모순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코뮌주의는 판 빠레이스 자신이 요청한 조건들에 위배된다. 그에 따르면, 기본소득을 극대화한 코뮌주의는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해야 한다(Van der Veen/Van Parijs, 2006a: 3). 그리고 이는 이타적인 인간의 대대적인 양성이라는 무리한 전제조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앞의 글: 4-5). 물론 판 빠레이스도 자기 주장의 이러한 모순을 점차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앞에서 보았듯이 후기로 갈수록 그른 이러한 자신의 코뮌주의론에 유보조건을 달거나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 결과 그는 애초의 급진적인 코뮌주의론에서 후퇴하여 ‘코뮌주의 + 지분배당 자본주의 내지 협동조합적 자본주의’를 절충한 ‘최적자본주의’를 주장하거나(Van Parijs, 1995: 206), 부분적인 기본소득에서 시작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전면적인 기본소득으로 나갈 것을 주장하는 온건주의로 급선회하는 절충성을 보이기도 한다(Vanderborght/Van Parijs, 2005: 124이하).  


더구나 1995년 이후 고용지대와 관한 그의 입론은 고율의 노동소득세로 귀결된다. 그리고 스스로 이는 기본소득의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좋은 방안이라고 자신한다(Van Parijs, 1995: 90). 이는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서유럽의 가처분GDP 중에서 명목상 ‘노동소득:자본소득’의 비율이 ‘7:3’ 수준으로 노동소득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소득 비중은 한국의 ‘6:4’나 미국의 ‘6.5:1’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에 누락된 자본주의적 부동산‧금융 투기소득을 감안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부동산‧금융 투기소득은 대체로 최종적으로는 노동소득의 누출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정확히 측정할 순 없지만 서유럽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처분GDP의 30% 수준을 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기본소득의 또 다른 재원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판 빠레이스는 이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나친 고율의 노동소득세를 통해 기본소득 재원의 상당부분을 마련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노동유인이 급격히 감퇴하여 사회전체의 생산력이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신이 주창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자기모순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4. 21세기 대안사회 분배원리의 재구성

 

이처럼 21세기 대안사회에 대한 비전의 차이는 현재의 기본소득모델들 간에 차이를 낳는 강력한 요인이다. 나아가 대안사회에 대한 비전의 모호함은 현재의 기본소득모델의 내용과 위상을 흔드는 배경이 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대안사회의 경제원리 특히 기본소득과 밀접히 연관된 분배원리를 기본적인 차원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맑스의 두 국면으로 분리된 코뮌주의 경제원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코뮌주의 첫 번째 국면의 지배적인 경제원리인 ‘노동성과(Arbeitsleistung)에 따른 분배’(MEW 19: 21)는 다소간 ‘필요에 따른 분배’에 의해 보충되긴 하지만, 21세기 자본주의를 넘어서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현재까지 서유럽 자본주의국가들은 아직 기본소득을 실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처분GDP의 40-50% 수준에 이를 만큼 상당한 수준의 ‘필요에 따른 분배’를 실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필요에 따른 분배’의 차원에서 현대 자본주의국가 중 일부는 이미 맑스의 코뮌주의 첫 번째 국면보다 앞서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보다 고차적인 코뮌주의 국면의 경제원리로 맑스가 제시한 “각자 능력에 따라,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MEW 19: 21)는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라는 점이다. 맑스의 원리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경제원리를 뜻한다. 그런데 앞서 판 빠레이스를 검토하면서 보았듯이 이는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의 천국이자 헌신적인 사람들의 지옥으로 귀결될 수 있는 원리이다. 왜냐하면 각자 노동과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면 능력껏 일할 사람은 헌신적인 일부의 사람들로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노동자를 감소시켜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수준의 축소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맑스의 두 개의 국면에 따라 분리된 코뮌주의 경제원리들은 시대적으로 낡았거나 아니면 지속가능성이 낮은 유토피아라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그 원리들은 변형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따라 21세기 코뮌주의의 상도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대안은 시공간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및 ‘필요에 따른 분배’를 통합하여, ‘노동성과+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단일한 코뮌주의의 분배원리로 변형하는 것이다. 곧 사회전체의 가처분GDP 중 50% 수준은 노동성과에 따라 기업별·개인별로 분배하고, 나머지 50% 수준은 사회전체성원들에게 필요에 따른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는 원리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자본소득·자산소득·투기소득을 코뮌주의적인 기본소득이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은 두 가지 점에서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과 다르다. 첫째로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의 재원은 사후적인 조세가 아니라, 사전적인 사회전체의 실질적인 가처분GDP의 일정비율이다. 이는 생산수단을 사회전체성원의 공유로 전환시키며 생산에서 추가되는 전체 부가가치를 사회전체성원의 재산(예를 들어 사회연대기금이라 하자)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되면 세수관리를 위한 행정비용이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보다 훨씬 더 절약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본에 대한 사적소유의 폐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은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과 달리 자본주의적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전혀 허용하지 않으며 이를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을 전제하는 ‘50%의 노동소득+50%의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은 ‘노동성과+필요에 따른 분배’의 구체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21세기 코뮌주의가 시공간적으로 두 개의 국면으로 분리된 경제원리들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경제원리에 기초한 단일한 생산양식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처럼 새로운 21세기 코뮌주의 경제원리가 기존 자본주의에 비해 경제적으로 우월한가 또는 지속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부분 나라의 가처분GDP 통계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60-70% 수준이며 자본·자산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30-40%에 이른다. 그러나 GDP 통계의 한계로 인해 임대료 등 상당수 자산소득은 포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GDP 통계는 증권양도차익 및 부동산양도차익 등 자본주의적 투기소득은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상 노동소득 중 상당부분은 부자들과 금융투기자본의 불로소득이나 투기소득으로 수탈된다. 따라서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현대자본주의 국가의 가처분GDP 중에서 노동소득은 실질적으로 40% 이하에 달하고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은 실질적으로 60%를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유인과 생산유인을 극대화하는 체제가 아니라, 투기소득을 포함한 불로소득을 극대화하며 노동유인과 생산유인은 오히려 약화시키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체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본주의적인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의 대부분을 ‘필요에 따른 분배’인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킨 21세기 코뮌주의의 분배원리는 <그림 1>의 세 번째에서처럼 대략 ‘50%의 노동소득+50%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 구성된다(구체적인 비중은 사회성원들의 결정에 따라 다소 가변적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된 21세기 코뮌주의의 분배원리는 자본주의의 분배원리보다 실질적인 노동소득의 비율을 상승시킴으로써 노동유인 및 생산유인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불로소득과 투기소득 대부분을 폐기하여 사회전체성원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성원들이 투기에 낭비하는 막대한 시간을 자유로운 향유의 시간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나아가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은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증가시켜 사회의 소비능력과 더불어 생산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자본주의보다 더 빠르고 질적인 성장을 촉진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된 21세기 코뮌주의 분배원리는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지속가능하다.  


그리고 생산수단이 사회전체성원의 공유로 전환됨으로써 자본과 더불어 임노동은 폐지되고 노동자들은 노동자 겸 공동경영자로 전환된다. 그리고 사회전체성원은 각각의 노동자집단에게 생산 및 경영을 위임하는 대신 가처분GDP의 일정비율인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을 받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회성원들은 기존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연대기금으로부터 집단적으로 자유롭게 투자자금을 활용하고, 역시 가처분GDP의 일정비율을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으로 귀속시키며 나머지 일정비율은 자신들의 노동소득으로 지급받게 된다. 따라서 방만한 투자 및 기업활동으로 추가적인 부가가치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노동소득은 0이 되므로 유고의 자주관리와 달리 방만한 연성예산제약문제는 크게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본이 없더라도 능력·소질·아이디어 등만 있으면 누구나 자유로운 생산 및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노동 및 생산 유인이 자본주의보다 월등히 확장될 것이다.

 <그림 1> 분배원리: 자본주의, 이행기, 21세기 코뮌주의

노동소득

40%

노동소득

40%

노동소득

50%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

60%

불로‧투기소득30%

코뮌주의적 기본소득

50%

기본소득

30%

기존

자본주의 분배원리

이행기의

해방적 기본소득

21세기

코뮌주의 분배원리

 

 

나아가 이글에서 제시된 21세기 코뮌주의 분배원리 및 경제원리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판 빠레이스의 코뮌주의 내지 ‘최적자본주의’보다도 경제적으로 우월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판 빠레이스의 최종목표점인 코뮌주의 내지 ‘최적자본주의’는 맑스의 코뮌주의 고차국면과 유사하게 생산수준의 절대적인 정체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지속가능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판 빠레이스의 코뮌주의모델은 사실상 점진적인 진화주의적 코뮌주의 이행전략으로서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사실상 유지시키고 노동소득에 대해서 고율로 과세함으로써 생산유인 및 생산의 수준이 이 글에서 제시된 모델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50%의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복지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 게는 보다 많은 기본소득이 지급되고, 현물 보조 및 그들의 이동권 등은 오히려 현재의 자본주의적 사회복지수준보다 월등히 강화되어야 하며, 기타 교육·의료·생태환경·맑은물·통신‧무상급식‧보행자전용길‧맑은공기‧대중교통 등은 사회전체성원들이 무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물기본소득 내지 코뮌재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방공동체 차원에서 이러한 현물기본소득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방공동체는 성원들의 다양한 현물적 필요를 보다 용이하게 알 수 있고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노완, 2010: 95-96). 판 빠레이스도 지적했듯이, 기본소득은 이러한 추가적 사회복지 및 현물복지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령별‧장애에 따른 현금기본소득과 더불어 이러한 추가적 사회복지를 현물기본소득의 형태로 확대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Van Parijs, 1995: 42-45).


그런데 여기서 제시된 21세기 코뮌주의의 분배원리와 경제원리는 사적소유의 사회전체성원의 공유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실행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자본주의라는 시공간적 제약 속에서 활용 가능한 이행의 경제적 조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5. 21세기 코뮌주의로의 경제적 이행전략
   = 해방적 기본소득+연기금 및 금융자본을 활용한 주식회사의 공유화

 

사실상 사회전체성원의 공동소유인 연기금 및 금융자본을 활용하여 대부분의 상장·비상장 주식회사를 사회전체성원의 공유로 전환한다면 21세기 코뮌주의로의 이행은 경제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한국을 포함한 21세기 자본주의 국가에 이미 충분히 주어져 있다. 한국에는 이미 250조원 수준의 사회적 공동소유인 연기금이 적립되어 있으며, 기업들이 사실상 전체사회성원의 공동소유인 은행 등 금융자본으로부터 자기자본의 평균 100%수준에 달하는 부채를 갖다 쓰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인 역량만 뒷받침된다면, 당장에라도 대다수 생산수단을 전체사회성원의 공동소유로 전환할 수 있는 21세기 코뮌주의의 시초축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현실사회주의의 끔직한 과오와 실책 그리고 특히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의 레드콤플렉스는 이러한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에서의 해방적인 세제개혁을 통해 21세기 코뮌주의의 비전을 앞당길 수 있는 중간 경로의 가능성도 유망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 그리고 토지 내지 생태환경에 대한 조세를 강화하여 추가적인 재원을 확보하는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안에서 조세개혁을 통해서 실현가능한 최대치의 급진적 기획일 것이다. 이러한 해방적 기본소득이라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약화시키고 공동소득에 대한 사회전체성원의 코뮌주의적 권리의식을 촉진하며 녹색 및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와의 연대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초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제출한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었다(강남훈·곽노완, 2009: 65-82).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1>의 중간부분에 해당한다.


이러한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이 ‘21세기 코뮌주의로’의 이행전략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요소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자본주의적인 투기적 증권양도차익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최대의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는 제안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는 주식 등 증권가격의 하락을 촉발하여, 연기금 및 금융자본을 활용해 주식회사의 전사회적 공동소유로의 전환을 쉽게 해 줄 것이다. 둘째로, 이자소득·배당소득·토지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여 상당한 재원을 조달하자는 제안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이윤을 사회적으로 환수하여 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약화시키며 자본주의적 불로소득에 대한 사회전체성원의 권리를 확장하는 기제라 할 수 있다. 셋째로, 코뮌재인 생태환경을 소모하고 파괴하는 데 대해 환경세를 신설하여 자본주의적인 생태환경파괴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넷째로, 토지세 신설을 통해 지가를 낮추고 토지사회화의 유리한 조건을 촉진할 방안을 제시했다. 다섯째로, 기본소득에  무상교육·무상의료 제도를 결부시킴으로써 코뮌재의 확장과 이에 대한 사회전체성원의 권리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회전체성원의 사실상 공동소유인 연기금과 금융자본을 활용해 모든 주식회사를 사회전체성원의 공유로 전환함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이윤과 투기소득(이자+배당+지대+증권양도차익+부동산양도차익)을 코뮌주의적인 기본소득으로 전환할 방안을 열어놓았다(강남훈·곽노완, 2009: 82-83). 이는 자본주의의 폐기 및 21세기 코뮌주의 시초축적의 경제적 계기와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서 제시된 원리와 세부방안 중에 수정‧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많이 있을 것이다. 장애인에 대해 보다 높은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현물기본소득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만을 고려했는데, 무상보육‧돌봄노동서비스‧공공임대주택‧맑은공기‧무상급식‧보행자 전용길과 광장‧보다 많은 공원 등이 추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에 무상급식‧보행자 전용길과 광장을 포함해 많은 것들은 지자체 차원에서도 당장 실현가능한 현물기본소득일 것이다. 또한 노동소득에 대한 증세를 가능한 한 억제하였고,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은 가능한 한 중과세 하여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이 원칙을 보다 강력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노동소득의 경우 특별한 고소득이 아니라면, 증세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 총액으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는 노동소득증세로 인해 임노동자들이 기본소득도입에 대해 심리적으로 거부감이나 부담을 갖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생각지 못했던 재원의 원천을 그간에 새로이 발굴하기도 했다. 통화증가량 중 일정비율이나 통화창조차익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미 마이런 프랭크만(Frankman)은 세계단일통화체제를 구축하고 인플레를 유발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 단일통화창조수익을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Frankman, 2006: 60; Van Parijs, 2006: 46). 일단 현재처럼 화폐주조권이 각국 중앙은행에 귀속하는 한, 이러한 방안은 국가별로 추가적인 기본소득의 재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각국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으로부터 통화창조권을 회수한다면 후버나 더글라스 등이 주장했듯이 그 재원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스스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6. 기본소득운동의 주체와 노동운동

 

기본소득은 결과적으로 부자와 자본가의 소득을 노동자계급 및 사회의 경제적 약자에게 이전하는 제도이다. 특히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설계한 기본소득은 2인 가족을 기준으로  연간 실소득이 1억원 이하인 경우 이득을 보는 모델이다(강남훈·곽노완, 2009: 69). 이는 대체로 한국사회에서 상위 10%의 소득이 나머지 90%에게 이전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구의 90%는 이 기본소득모델의 잠재적인 지지자이자 한국기본소득운동의 잠재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맑스가 『자본』에서 착취(Ausbeutung, Exploitation)당하는 임노동자계급으로 정의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MEW 23: 642)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탈산업사회에서 불안정한 노동과 소득에 시달리면서 초과착취당하거나 수탈(Expropriation)당하는 모든 사람들 곧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21세기 들어 전지구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해방적 기본소득운동의 평등한 주체들이다.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은 실업과 빈곤에 대한 근원적인 대안일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노동+생태+여성+실업자+장애인+인권+의료+대안교육+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농민+대학생+청소녀(년)+노령자 운동의 주체를 비약적으로 활성화시키며 이들 다양한 운동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운동주체의 형성과 연대를 위한 지렛대가 될 기본소득운동은 대안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경제적인 조건을 확보하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주체를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운동은 유력한 주체형성전략이자 진보역량을 극대화시키는 연대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해방적인 기본소득이 현실화되면 경제적 권리만 신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무소득 노령층, 가정주부, 장애인, 청소녀(년), 대학생, 실업자, 사회운동가,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등 독자적인 경제적 소득이 없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조차 보다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된다. 이는 그 자체로 우리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꿀 것이다. 임노동자들은 연장근로를 하지 않아도 더 많은 현금소득과 더 많은 현물소득을 얻게 될 것이므로 세계최장시간 노동하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간접적으로 일자리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해방적 기본소득의 시공간은, 우리가 자본의 사슬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며 보다 원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는 다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배가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MEW 4: 482),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MEW 23: 92), “연합지성(associirter Verstand)”(MEGA II.4.2: 331)의 사회,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이 근본 원칙”(MEW 23: 618)이 되는 사회, 곧 코뮌주의를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해방적인 기본소득이 21세기 코뮌주의로의 이행전략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특히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제시한 한국의 기본소득 모델은 자본주의적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서 최대한의 재원을 환수하며 노동소득 증세는 가능한 한 억제한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압도적인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모델이다. 이는 기본소득 재원의 압도적인 부분을 고용지대를 통해 마련하고자 한 판 빠레이스의 모델이나, 노동소득을 포함한 모든 소득에 대해 일괄적으로 추가적인 35%의 증세를 하겠다는 독일 좌파당 연방연구회 기본소득위원회의 모델처럼 상당비율의 정규직에게 손해가 되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는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이 자본주의적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압도적인 재원을 발견해 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또 다시 이러한 발견은 자본주의를 넘어설 구체적 상과 명료한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급진적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사회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 대안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에서 한국의 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은 잃을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97-98년 IMF위기 이후 급격히 질시의 대상으로 뒤바뀐 정규직 노동자들과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은, 초과착취당하며 수탈당하는 21세기 진보운동의 새로운 주체인 프레카리아트와 거대한 희망을 나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96-97년의 노동자대투쟁 때보다 훨씬 더 평등하고 매력적인 연대의 파트너로 새롭게 부상할 것이다. 해방적인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지름길이다.
     

이 글은 지난 5월 28일 광주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111호에서 열린, 5ㆍ18 기념 재단 주관 [5ㆍ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중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토론회에서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의 발표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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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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